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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저자 소개

최형준

1997년 8월 8일 군산에서 태어나 현재는 서울에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단번에 드러나지 않는 아름다움을 동경해 언제나 그 안에 머물며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발레 전공으로 재학했다. 별안간 읽고 쓰는 일에 뜻을 품게 되어 이렇듯 점잖은 화자로서 지면을 통해 당신과 만났다. 가르쳐 줄 건 별로 없지만, 들려주고 싶은 얘기는 무진장 많다. 2020년, 산문집 『우울보다 낭만이기를』을 출간했다.

목차

  1. 1. I’d love it if we made it
  2. 사랑의 기본기
  3. 템포의 단상
  4. 한없이 투명한 젊음의 초상
  5. 동결된 기억
  6. 이 도시에서 나는 조급할 이유가 없다
  7. 속초
  8. 멋 사랑 평화
  9. 블루진
  10. 거기서 한밤 자고 나면 내가 좋아지는 겁니까
  11. 최소한의, 그러나 더 나은
  12. 예술이라면
  13. 사진 사진 사진
  14. 2. Even if I have a dirty heart
  15. 자전거
  16. 새벽의 다정함
  17. 확실히 글쓰기는 옮는 거다
  18. 피다 만 꽃도 꽃인 걸
  19. 그해 여름 손님
  20. 삐뚤빼뚤 만우절
  21. 누구 누구야
  22. 사뭇 달라진 밤
  23. 3. Love collection
  24. 이상적 흡연에 관하여
  25. 오락
  26. 레코드
  27. 기묘한 작업
  28. 상실의 시대
  29. 산책
  30. 경화가 더딘 마음

책 속으로

또 한 번 그때처럼 엉망으로 무너지는 날이 있어서야 안 되겠지만, 정말로 그와 같은 시절이 내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느낄 수 있다. 단지 그 얼얼한 감각을 어떤 말로 달래 두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 p.16

결과만이 중요한 삶이라면, 일상의 모든 것은 죽음을 향한 과정으로 전락한다. 누구도 죽기 위해 살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의 방식대로 즐겁게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당신이 사랑에 빠지는 일을 뒤로 미룬다면, 그때마다 절벽 아래로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만다. 이루어 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을.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만 허락되는 아름답고도 값진 가치를
--- p.32

무언가를 잊는다는 것, 잃는다는 것, 그래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는 것. 그건 지나치게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그 서글픔조차 잊고, 잃어버려서 다시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미 잊어버렸기 때문에, 지금도 잃어버리고 있기에, 그래서 때때로 자연히 고통스럽다. 그러니 다시 볼 수 없는 것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아낄 이유가 없다.
--- p.38

단지 일상의 배경이 낯선 도시로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도무지 손쓸 수 없는 무력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 도시는 나를 알지 못한다. 나 또한 이 도시를 모른다. 이 도시는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이 곳은 내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하는 실감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고독을 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본질의 근간을 뒤흔들 만큼 커다란 우울감을 동반했습니다.
--- p.44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것이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혹자는 정말로 그렇게 믿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어디까지나 행운이 따르는 경우의 얘기지만, 우리들은 살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정말이지 강렬한 사랑을 맞닥뜨린다. 그때는 온몸의 감각이 멀어버리고, 삶의 불확실성 같은 건 대수롭지도 않게 느껴진다. 그 불안한 여정을 꼭 붙어 함께 헤쳐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마저 설레고 마는 것이다.
--- p.62

능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냉소적으로만 바라보는 것들, 내 삶엔 몇 가지나 더 남아 있을까. 이렇게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친해지다 보면, 내 행복의 외연은 얼마나 더 확장될지 못내 기대가 된다. 달리 말해 이것저것 미숙한 게 많은 오늘의 내 처지도 꼭 나쁘지만은 않은 거다.
--- p.116

‘새벽’과 ‘고독’은 부정적인 의미로서 오랜 시간 오해를 받아 왔지 싶다. 그럼에도 그들은 묵묵히 단란한 안식처를 내어 준다. 몇 시간이 고작이지만, 하루도 빼먹지 않고 곁에 있겠다며. 그러니 필요할 땐 잠시 쉬어 가라고. 그리고 때가 되면 언제라도 떠나가라고. 새벽은 매일 그런 얘기를 나직이 속삭이며 우리의 지친 발길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볕을 웃도는 다정한 마음이다.
--- p.121

다시는 춤을 추지 않겠다고 결정했던 때, 나는 나의 지난 시간이 전부 죽어버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죽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어떤 특별한 소양을 나는 이미 한 차례 극도로 고양시킨 것이다. 예술의 중심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내 삶은 결코 초라할 수 없었다. 내겐 예술가로서의 여러 자질이 이미 완성되어 있다. 그러니 내 지난날의 가치는 앞으로도 나의 영혼을, 나의 예술과 사랑을 빛낼 것이다.
--- p.137

언젠가 짝을 만나 결혼을 한다면, 오랫동안 고민한 이름으로 함께 개명하는 상상을 한다. 어느 겨울 아침, 함께 구청으로 향해 개명허가서를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거다. 그리곤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오는 길에 사 온 붕어빵을 호호 불어먹으며, 새로 지은 서로의 이름을 불러 본다. 누구누구야, 누구누구야. 틀림없이 좋은 날이 될 테죠.
--- p.159

‘멋대로’의 의미는 결코 그런 가벼운 개념이 아니다. 얼핏 비슷하게 보이는 그 두 가지 태도 사이에는 결코 하나로 합쳐질 수 없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우아함의 유무이다. ‘아무렇게나’가 플라스틱 조화라면, ‘멋대로’는 살아 있는 생화이다. 살아 있는 꽃은 호흡한다. 꽃이 피기 전부터 자신의 존재가 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확신한다. 아름다움을 확신하는 일은 우아함 없이 성립될 수 없다. 우아함이 배제된 ‘멋대로’는 ‘아무렇게나’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 p.213

5월 무렵에는 커다란 장미를 보고, 여름에는 공 차는 금발 머리 아이들을 구경한다. 그러고 언덕을 내려와 진짜 맛있는 수제 버거와 밀크셰이크를 왕창 먹어준다. 그 길로 나는 당분간의 사랑 총량을 충전하는 것이다.
--- p.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