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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기

저자 소개

최형준

1997年 8月 8日生
글과 사진을 만들고 가다듬는다.
잊혀가는 아름다움을
유일한 아름다움이라 여긴다.

2020 「우울보다 낭만이기를」
2022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를 출간했다.

Instagram @gudwns97

목차

  1. Prologue
  2. 1. 유랑
  3. 고마워요, 친절한 켄트미어군
  4. 내가 바라는 여름휴가란
  5. 나의 해변일지
  6. 내가 차지한 작업실 1
  7. 내가 차지한 작업실 2
  8. 긴 머리카락에 관해
  9. 2. 표류
  10. 서문 : Do I love this quiet moment?
  11. 센티멘탈 취재 일지
  12. 센티멘탈 취재 일지 : Coffee Store
  13. 센티멘탈 취재 일지 : MiDoPa Coffee House
  14. 센티멘탈 취재 일지 : 터방내
  15. 3. 귀소
  16. 꽃을 찍는 일
  17. 덧없는 멜로디, 슬픈 리릭스
  18. 낮이 긴 나라에 살고 싶다
  19. 나는 두 번 다시 춤을 추지 않아도 좋은 걸까?
  20. 한 시절과의 작별을 예감한 어느 오전
  21. 감기에 걸린 날
  22. Epilogue

책 속으로

나는 그와 같은 태도가 나의 삶의 태도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세상이 내게서 컬러를 앗아가려 할 때, 일시적인 제한에 항복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묵묵히 해내는 것이다. 남아있는 흑백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완벽히 숙달하는 기회로 삼는 거다. 그러면 멀지 않은 날에 그 제한이라는 것을 뚫고 앞으로 나아갈 만큼 성장하게 되는 게 아닐지. 그런 식의 성장을 거듭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이토록 불완전한 세계를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 p.18

날이 밝으면 해변으로 뛰쳐나갈 생각만 하며 원인 모를 슬픔을 견뎌 내는 거다. 머지않아 날이 밝을 테다. 맨발로 5분만 운전하면 해변에 도착할 테다. 거기엔 뜨거운 땡볕이, 시원한 바다가, 폭신한 모래사장이, 새로 사귄 친구들이 있다. 그렇다면 하루 새벽쯤은 눈 딱 감고 얼마든지 가라앉아도 좋지 않은가? 그런 생각으로 저 자신을 다독이며.
--- p.30

화해의 담배를 피우고, 해변에 자리를 잡은 뒤로는 정말이지 즐겁기만 했습니다. 물에 들어가기 전 내가 상의를 벗자 B는 며칠 사이에 드라마틱하게 변한 내 피부색에 놀랐습니다. 나는 그것이 마치 오랜 시간 바다와 어울린 삶의 징표라도 된다는 듯이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겨우 사흘 늦게 도착한 B에게 그동안 내가 바다에서 가졌던 아름다운 시간을 뽐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 봐라, 나는 벌써 해변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하고 말입니다.
--- p.45

우리는 어떠한 시간을 기대하며 비용과 공간을 할애한다. 잘 고른 가구를 바라볼 때의 시각적 충족감 또한 중요한 것이나 그보다는 그것을 갖게 됨으로써 가능해지는 ‘경험’을 고려하는 거다. 깊은 수면을 위해 침대를 고르고, 안락한 휴식을 위해 소파를 고르며, 심심한 새벽을 견디기 위해 TV를 사고, 한적한 식사를 위해 식탁을 들인다. 한데 침대의 사이즈, 소파의 가용 인원, 테이블과 의자의 개수를 결정할 때는 ‘누구와 함께 경험할 것인가’가 고려된다. 그에 따라 할애되는 비용과 공간은 또 한 번 좌우되는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내 작업실은 의미심장한 인상을 준다. 나는 대체 ‘누구’와의 ‘무엇’을 기대하며 이토록 여러 사람의 자리를 마련해 둔 것이냐 말이다.
--- p.70

필연적으로 커피숍이라는 장소와 나 사이에는 무언가 끈끈한 유대 관계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다른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애틋한 확신 같은 것 말이다. 내 쪽도 상대를 만나면 마음이 놓이고 상대 쪽도 내가 오면 구수한 원두 냄새를 풍기며 반겨 주니 우리 둘 사이의 장르는 필시 로맨스일 것이다. 그녀가 “자, 여기선 직접 청소할 필요도 없고, 어질러진 책상도 없어. 멋대로 드러누울 곳도 없지. 저기 봐.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그렇지, 이제 똑바로 앉아 보자. 졸려도 참아야 해. 노트북 펼친 지 5분 만에 졸고 있으면 사람들이 흉봐. 뭐라고? 담배? 너 정말 나 망신시키고 싶어서 그러니?”라며 나를 몰아세운다. 그러면 나는 “으응, 참아 볼게.” 하고 졸린 눈을 비비며 허리를 세워 한동안은 노트북을 노려본다.
--- p.106

터방내가 영업을 시작했을 때의 20대 청년들은 60대가 되었다. 그만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터방내는 자리를 지켜 낸 것이다. 앞서 취재한 커피 스토어와 미도파는 내가 60대가 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켜 낼 수 있을까? 독자들의 메일에 적혀 있던 그 수많은 커피숍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운 일일 테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는 지켜지는 것보다 사라지고 마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법이니까. 그렇기에 새삼 더욱 감동하게 된다. 함께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에 말이다. 결국 우리는 그 모든 걸 기억의 뒤편으로 이격하는 작업에 가담하고 있다. 영차, 영차.
--- p.163

낮이 긴 나라에 살고 싶다. 그중에도 해가 제일 늦게 떨어지는 도시에 정착하고 싶다. 하루의 구분은 밤과 밤사이에 지어지지만, 우리는 밤이 아닌 낮을 떠올리며 지나간 나날을 센다. 우리는 밤에 늙고, 낮에 젊은 것이다. 그러나 그 젊음이란 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낡아 가는 기분만 느끼며 산다. 조용한 나날을 사랑할 수 없으면, 나 같은 사람의 생애는 고달프다. 두말할 것 없이 나는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
--- p.201

나는 저녁 공연 리허설을 앞두고 두 번 다시 춤을 추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때의 명랑한 심장박동을 기억한다. 그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얼굴 위로 번져 가던 미소를 기억한다. 또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밤잠을 설치는 한편, 어쩌면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새벽을 기억한다. 그날들의 설렘과 흥분을 잊지 않는 한 나는 앞으로도 어디로든 떠나갈 수 있다.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다. 불안의 배후에는 용기가 있고, 용기의 배후에는 가능성이 있다. 비록 불투명한 가능성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을 소중히 여길 때, 우리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 p.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