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현
지친 몸이 누워 쉴 수 있는 집이 존재하듯, 정처 없이 방황하는 내 마음이 쉴 수 있는 안식처가 필요했다. 그래서 글을 쓴다. 글을 쓰는 순간, 내가 있던 곳은 안식처가 된다. 이 책은 내 마음이 편히 쉬는 집과 같다. 나의 글을 읽는 누군가의 마음도 이곳을 편안한 집으로 삼길 바란다. 마음이 쉴 곳 없을 때 이 책에 잠시 기대어 쉬었다 가기를.
지은 책으로는 『지우개 같은 사람들이 나를 지우려 할 때』, 『그저 내 곁에 머문 것이었음을』이 있다.
어린 새들은 엄마 새가 절벽에서 밀어 떨어트리면 그 떨어지는 순간에 나는 법을 배운다고 한다. 낙하의 두려움이 날갯짓을 하게 만들어, 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새로움 앞에 두려워하고 있다면 오히려 아무 생각하지 말고 내 온몸을 던져 보는 건 어떨까.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는 게 두려워 살려고 발버둥 치는 나의 날갯짓이 용(勇)을 힘입어 훨훨 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 p.14
흰 종이에 연필로 점을 콕 찍어 보자. 이 점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시작점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점을 천 배 확대하면 동그란 원이 된다. 같은 방식으로 그 원 안에 점을 찍어 천 배 확대하면 또 원이 생긴다. 세상에 시작점은 없다. 우리는 점처럼 보이는 동그란 원 안에 살고 있으며, 그 세상은 무한하게 확대된다. 시작을 찾아 탓하고 싶었던 마음. 그것은 그저 핑계 대고 싶었던 마음 아닐까.
--- p.85
그때 알았다. 부정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통의 여운도 오래 남는다는 걸. 쓴 것도 끝내 삼켜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 것도 쓴 것도, 행복도 아픔도 모두 내가 삼켜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그 어느 것 하나 내가 뱉어 낼 수 있는 건 없었다. 나는 알게 되었다. 어른들은 쓴 걸 좋아하는 것도, 잘 먹는 것도 아니었다. 고통을 오래 머무르게 하고 싶지 않아 어떻게 해서든 조금 더 빨리 삼킬 줄 아는 것뿐. 그것뿐이었다.
--- p.102
사랑 한 폭 그려내기 위해 제일 먼저 택한 일은 나를 온전히 버리는 일. 네 안으로 완전히 뛰어드는 일. 흠뻑 젖은 채로 열심히 춤을 추던 붓은 그렇게 사랑 한 점을 끝낸다. 나는 이제 맑은 물통으로 들어가 온몸에 묻은 흔적을 열심히 씻어 내 본다. 그러나 맑은 물에 아무리 빨아도 이미 깊게 스며들어 염색되어 버린 것들은 벗겨질 기미가 안 보인다. 이것은 사랑의 작품이다. 나는 그렇게 사랑에게 쥐어져 매번 조종당하는 것이다.
--- p.148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형태를 온전히 지켜 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서로 닮고 싶다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면 된다. 부드럽고 유연하게 스스로 변화하며 바뀌는 것이다. 각기 다른 발걸음을 맞추는 일은 서로의 발목에 줄을 묶어 같이 걷는 게 아니라, 나와 닮은 걸음걸이를 한 사람을 찾거나, 조금 다른 보폭이지만 한 발씩 물러나 간격을 맞추며 걸어 나가는 일이다. 우리가 다른 걸음걸이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일은 모두 사랑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의미다.
--- p.172
계속되는 물살에 결국 내 옆으로 비껴가면 나는 다시 벌거벗은 몸이 될 것을 알면서도. 내게 멈추어진 것들은 시간의 물살을 버티지 못하고 나를 비껴서 가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결국 나는 빈손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빈 몸이다. 모든 것은 내게 남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무언가 많이 남겨져 있는 듯하다. 나를 거쳐 간 것들이 내게 무언가를 주고 떠난 듯하다. 행복한 맨몸뚱이다.
--- p.195
겨울은 어차피 지나갈 거라고. 비록 지금은 눈물 나게 춥지만 두 달 뒤면 괜찮아질 테니까.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되뇐다. 지금을 견디기만 한다면 따뜻함이 나를 맞이할 거라는 믿음을 크게 키운다. 그러다 보면 이 추위가 지나는 게 살짝 아쉬워지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맞닿아 있다. 추운 겨울은 따뜻한 봄과, 만남은 이별과, 빛은 어두움과 맞닿아 있다. 영영 지속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그 힘듦도 슬픔도 쓰라린 추움도 꼭 지나가고 말 것이라고.
--- p.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