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후로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면 어김없이 광안리에 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원고를 마감할 때도 광안리에 옵니다. 그러나 오늘은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누구와도 이별한 적이 없는데 어떤 마음으로 여기에 앉아있는 걸까요.
--- p.14
- 너무 사랑하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무서워집니다. 저 사랑 언젠가 끝이 나고 말 텐데. 같은 두려움입니다. 사랑의 불변함을 믿지 못하는 것도 무섭고, 다신 저렇게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아 무서워집니다. 내가 다시 누군갈 벅차게 할 수 있을까. 너무 사랑해서 미쳐버릴 것 같단 소릴 또 하게 될까. 내겐 이제 남아있는 게 별로 없는데.
--- p.40
- 은이는 헤어지면서 내게 꽃이 필 때쯤 다시 만나자고 했는데, 어떤 꽃인지는 끝내 이야기해주지 않은 바람에 동백이 피는 일 월부터 국화가 피는 십일 월까지 내내 은이의 연락을 기다려야만 했다. 일 년에 11개월은 새로운 꽃이 핀다는 사실 나는 은이 때문에 알았다.
--- p.50
- 오늘은 널 바래다주던 곳에서 다른 사람을 배웅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적질 못하고 너의 동네로 가는 버스의 등만 하염없이 봤다. 다시는 탈 일 없는 버스의 경로를 아는 거. 쓸쓸한 일이다.
--- p.58
- 외로움의 어떤 모습을 적고 싶은 건데요. 했다. 그 질문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것이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세상에 외로워야 할 이유가 이렇게나 많다고. 게다가 어떤 밤에는 이유 없이 외로울 수도 있다고. 우린 태어난 이상 외로울 수밖에 없는 거라고. 당신만 외로운 게 아니라고. 그런 사람들이 여기. 이렇게나 많이 모였다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외로운 사람들끼리 서로 안아준대도 결코 맹렬한 속도로 타오르는 불이 되진 못하겠지. 그러나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앉아 긴 겨울을 나긴 충분할 거다. 나는 못내 그렇게 믿고 싶은 거다.
--- p.111
- 날 외롭게 만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젠 누가 그리운 건지도 모르겠는 삶을 삽니다. 어젯밤엔 대학동의 좁다란 골목길을 두 시간쯤 걸었습니다. 밤새 통화하며 흘린 목소리들이 사방에 널린 곳. 지켜지지 못한 약속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날엔 누구든 붙잡고 묻고 싶습니다. 나 잘하고 있는 거 맞지. 남들도 나처럼 가끔 대책 없이 괴롭기도 하고 그러는 거 맞지. 하고.
--- p.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