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묵돌
1994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대구로 이사했다. 기초생활수급자 세대로서 성인이 될 때까지 정부보조금을 받았다. 홍익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하며 상경했지만 생활고를 겪다 자퇴했다. 중학생 때부터 글을 썼다. 서울에서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취미삼아 인터넷에 쓰던 글이 관심을 끌었다. 팔로워를 수십만 명쯤 모았다. 페이스북에서는 ‘김리뷰’라는 필명으로 알려져 있다. 책 몇 권을 내고 강연을 몇십 번했다.
만 스무 살에 콘텐츠 기획자로 스카웃되면서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퇴사 이후에는 IT회사를 창업했다. 온라인 플랫폼을 기획하고 출시했지만 2년 뒤 경영난으로 폐쇄했다. 이후 빚을 갚기 위해 여러 온라인 매체에 칼럼 및 수필을 기고하면서 프리랜서 작가 생활을 했다.
본관이 영천인 이씨는 어머니의 성이고, 묵돌은 오랑캐 흉노족 족장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실제로도 무근본 오랑캐 같은 글을 쓴다. 굳이 의미를 갖다 붙이자면 몽골말로 ‘용기 있는 자’ 정도가 된다. 수필집 『역마』, 『사랑하기 좋은 계절에』, 『그러니까 우리, 갈라파고스 세대』, 『마카롱 사 먹는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요』, 단편 소설집 『시간과 장의사』, 『블루 노트』, 장편소설 『어떤 사랑의 확률』, 시집 『적색편이』 등을 썼다.
어떤 기억들은 내게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행복한 기분이 들고, 한편으로는 힘들고 고된 시기를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되곤 한다. 또 떠올릴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그런 추억이 하나쯤 있다는 것으로도 ‘내 인생은 꽤 가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나는 감사히 지나 보내며 생각했었다. 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 p.80
우리는 데면데면한 얼굴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아이스크림만 퍼먹었는데, 못내 웃음을 참지 못한 연이가 크게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어떤 감정은 말하는 것보다 더 나은 표현 방법이 있는 모양이다. 예컨대, ‘엄마는 외계인’이라든지.
--- p.102
소중한 사람의 우울함은 대개 절망적으로 다가온다. 그 우울함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곁에 있으면서도 이렇다 할 도움이 되지 못하는, 소중한 사람의 마음 하나 달래주지 못하는 스스로가 미워지곤 한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의 마음은 자기 자신 이외의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지니의 요술램프로도.
--- p.146
불 꺼진 방 안에서 서럽게 울었다. 살면서 그토록 서럽게 울어본 적도 없었다. 그때서야 나는 이 아득한 도시 가운데서 철저하게 혼자 놓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내내 혼자였을 때는 알 수 없었던 고독이었다. 함께 있음으로써 느낄 수 있는 행복만이 그런 종류의 고독을 체감케 한다.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잃어버리는 고통 역시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 p.158
나는 너무 아파서 사랑한 사실을 후회해야 했다. 사실은 그토록 소중했던 사랑을 마주하고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내가 죽도록 미웠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이미 저질러버린 이야기들을 하나씩 돌이켜보며 눈물지었다. 바닥에 떨어진 눈물은 하나둘 고여 웅덩이를 만들었고, 내게는 그대로 그 눈물에 빠져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밖에 남지 않았다.
--- p.159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기대하고 좌절한다. 주체할 수 없이 설레고 답답해한다. 흥분하고 축 가라앉는다. 황홀해지고 우울해진다. 밀어내고 도로 껴안는다. 꼴도 보기 싫었다가 한없이 그리워한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싸우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화해한다. 한때는 콱 죽어버리고 싶었지만 요새는 영원히 살고 싶다. 좀처럼 이해되지 않지만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다. 당신이 찾던 답과 다르다면 좀 미안하지만, 그래도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결국 사람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어떤 사랑을 향해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그 사이의 과정을 삶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사람과 사랑, 딱 그 중간쯤 되는 발음으로.
--- p.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