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선
나에게 연필은 글을 쓰거나 공부하는 데 쓰이기보다 손에 쥐어지는 대로 끄적이고 그림을 그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같이했다. 숙제로 주어진 일기를 꽤 오랜 기간 쓴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마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진 낙서였다. 서점의 저 수많은 책들처럼 뚜렷한 신념이 있거나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닌 내가 글을 쓴다는 자체가 부끄럽고 부담스러웠지만, 똑같이 고민이 많고, 상처를 받고, 위로받길 바라는 우리는,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 정서의 온도를 나누고 조금 더 따뜻해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내부 수리 중'
우리에게도 이런 표시가 필요한 듯하다.
군데군데 얽히고 어지러워진 속을 이 감추려고 끙끙대지 말고
서툰 손길로 막지 말고 각자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 p.19
뜯겨나간 자리를 회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드러운 보호제로 감싸주고
아물 때까지 건드리지 않고 놔두는 것. 가장 어렵고 가장 쉬운 일.
새로운 살이 내려앉는 그 시간을 견뎌주면 되는 것이다.
--- p.45
다 자란 성인은 있어도 다 자란 어른은 없다.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하고 알아가고
느끼고 삼키고 소모하고 채우고 버티고
또 그렇게 쌓이는 우리는 아직, 무럭무럭 성장하는 사람들.
--- p.69
나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는지 떳떳하게 말할 수 있고
자긍심이 옅게나마 보이는 얼굴을 지녔다.
제자리를 찾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나.
포기하지 않길 잘했어.
--- p.139
'이번 생은 망했어'
그 누구의 인생도 망하지 않았다.
살아갈 날은 길고 시도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진다.
그러니 다음 생에까지 미루는 행동은 하지 않기로.
--- p.173
나는 지금도 어색한 사람들과 있으면 반사적으로 웃는다.
그렇게 해서 나쁜 인상을 주는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많이 친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진심인 것처럼 포장을 해도 그 너머에서 웃음을 낭비하고 있는 걸 다른 사람도 모를 리 없다.
오늘도 외출하는 현관에서 거울을 보고 작게 다짐한다.
너무 애쓰진 말아야지.
--- p.179
오늘은 기억에 남지 않을 평범한 날들중 하나가 될 것이다.
어쩌면 훗날 운명의 날이 됐을 때,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추억들 속에 오늘은 분명 없겠지만,
평범하고 사소한 행복들로 채워진 하루들 속에 우리가 있다.
--- 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