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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살 만하고 하루는 죽고 싶었다

저자 소개

임부영

1987년 서울 금호동에서 태어났다. 2017년 상담 심리학 석사 학위를 받고 2018년 상담 심리사 2급을 취득하였다. 심리 상담 관련하여 작은 사업체를 준비 중이다. 마음을 주제로 글을 쓰고 만화를 그린다. 현재는 만화 ‘구르다 상담소’를 연재 중이다.

목차

  1. prologue 죽고 싶었던 하루는 기억에 남는다
  2. 1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3. 엄마. 나 죽고 싶어
  4. 뛰어놀지 못하니 너는 한심한 개일 뿐이야
  5. 훌륭한 그림을 그려야만 해
  6. 죽기를 포기했다
  7. 죽기 전에 연락해
  8. 당분간 괜찮은 날
  9. 버림받음과 괴로움의 관계
  10. 당신의 진단명은 깃털입니다
  11. 저 아무래도 다른 병 같아요
  12. 2부 마음을 삼키는 습관
  13. 어떻게 불러 드리면 될까요?
  14. 건방지고 성실한 내담자
  15. 다르게 살 수 있어요
  16. 그렇다면 절망도 선택인가요?
  17. 마음을 삼키지 말아요
  18. 마음과 말의 간극만큼 공허감이 생겨요
  19. 비난은 마음에 빚을 만든다
  20. 그것이 사실인가요?
  21. 마음의 배짱
  22. 한심하지 않아요
  23. 그런 상태에 있을 뿐이죠
  24. 현실을 정확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25. 마음의 냉장고
  26. 그것이 도움이 되는가?
  27.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
  28. 빛나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요
  29. 마지막 진료 - 드물게 완치가 된 걸까
  30. 10년 뒤에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나요?
  31. 못 접은 색종이는 좀 버리면 어때?
  32. 너는 지금도 충분해
  33. 상담은 책상을 정리하는 것
  34. 상담사가 되고 싶어요
  35.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36. 3부 우리가 다시 만나지 않으면 잘 지내고 있다는 뜻이겠죠
  37. 상담사가 되었다
  38. 내 상태는 이 정도면 됐지
  39. 더 일찍 찾아갈 것을
  40. 당분간 숨어 있을걸
  41. 포기하지 말 것을
  42. 하느님 말 듣지 말 것을
  43. 마음을 삼키는 습관
  44. 마음을 뱉는 일
  45. 상담사가 아니었다면
  46. 상담사가 되고 싶어요
  47. epilogue 5년 뒤, 아니 10년 뒤에 저는 어떤 모습일까요?

책 속으로

정신과 의사도 좋은 전문가였지만, 상담사를 만나고 나서 내 삶은 예상치 못한 변화를 겪었다. 삶의 태도나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도 그렇지만, 내가 그전까지 단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는 상담사가 되었으니 말이다. 만약 심리 상담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독특하며 굉장하기까지 한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상담사를 직업으로 삼을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교수는 이제 자유로운 그림을 그려야 한다며 떠들었지만,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평생을 묶어서 키운 개에게 예고도 없이 목줄을 풀어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개에게 이 세상의 크기는 목줄이 허용한 반경 1m가 전부다. 누군가 다가와서 개에게 말한다. “이제 자유를 줄 터이니, 개답게 뛰어놀아야만 해” 개는 처음 접한 자유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

“네가 얼른 커서 동생들을 책임지고 부모님을 도와야 하지 않겠니?” 지금 생각해 봐도 진짜 최악의 말이다. 그런 말쯤은 흘려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그땐 너무 어렸기 때문에 나쁜 말을 걸러서 마음에 담는 법을 몰랐다.

매일 밤 내가 왜 죽고 싶은지 알기 위해 온정신을 쏟았다. 그렇지만 내가 진정으로 죽음을 원하는 것인지, 사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죽고 싶은 것인지, 잘 살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난 건지, 뭐가 뭔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됐다.

“그래. 그럼 죽기 전에 연락해.” L은 끝까지 밝은 목소리를 유지했다. 그리곤 자신의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는 골목길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L의 엉뚱한 요청에 잠깐 벙쪘다. (중략) 나는 얼떨결에, 죽기 전에 연락하겠다고 L과 약속을 해 버렸다. 연락하지 않고 죽는다면 L은 분명히 서운해 할 것이다. L 때문에 죽음의 실행이 더 번거로워진 셈이 됐다.

“난 근데 니가 죽으면 힘들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왜? 내가 죽으면 미안한 마음이 들 것 같아? 못 살렸다는 죄책감 같은 거?” 그때의 나는 자살자의 주변인들이 슬퍼하는 이유가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일 거라 믿었다. 그렇게 생각이 단순했다. J가 말했다. “그게 아니고. 세상에 너라는 존재가 없으면 슬플 것 같아서….”

“그냥 부영 씨라고 불러 주시면 될 것 같네요.” 그리고 상담사에게 ‘어떻게 불러드리면 될까요?’ 같은 상냥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나는 서슴없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는 그냥 뭐…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죠?”

“분명히 다르게 살 수 있어요.” 상담사가 나를 바라봤다. 상담사의 눈은 따뜻하면서도 확신에 차 있었다. 아마 이날부터였을 것이다. 다리를 꼬지 않고 상담사와 눈을 마주치며 나의 마음을 꺼내기로 결심한 날이. 그날 본 상담사의 눈빛은 절망 속에서 잠을 설쳤던 나에게 한 줄기 희망이었다.

“부영 씨.” “네.” 짧고 간결한 내 대답이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상담사가 말했다. “입안에 든 것을 뱉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중략) “…썩을 것 같아요. 뱉지 못한다면 삼키게 되겠죠.”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썩은 것이 배에 가득 차고 말 거예요..” 상담사는 나를 위로해주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마음을 삼키지 말아요.”

‘마음과 말이 일치되지 않으면 벌어진 간극만큼 공허감이 생겨요.’ 이제부터라도 마음과 일치되게 말한다면 이미 생긴 공허감은 채워질 수 있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가슴이 점점 갑갑해졌다.

‘현실? 그랬었지. 꿈을 꾸고 열심히 살았던 때를 기억하잖아. 학교를 졸업하고도 일을 하고 바쁘게 지낸 적도 있었고. 다만 요새는 마음이 힘들어 누워 있는 시간이 많을 뿐이야. 그렇다고 해서 한심한 것은 아니잖아. 한심하다는 생각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그것은 사실이 아니니까.’ 나를 보고 상담사가 환하게 웃었다. 속으로 되뇐 말들이 상담사에게 전달된 것만 같았다.

“예전처럼 괴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답답해요….” 그러자 상담사가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는 나아질 때도 계단처럼 나아져요. 성장할 때도 그렇고요. 한 단계 올라가면 한참을 유지하다가 경험이 쌓이면 또 한 단계 올라가죠.”

“부영 씨가 10년 뒤에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는지 생각해 봐요. 천천히요.” 삶의 앞날을 그리지 못한 것이 나를 답답하게 만든 걸까. 예전처럼 훌륭한 화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왜 하필 그때, 그런 생각을 했을까. 괴로움에 빠진 예술가보다는 현명한 상담사가 되는 게 멋진 일이라고. (중략) 그렇지만 이내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상담사가 되고 싶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지금도 충분해.” 충분하다는 상담사의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굳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눈물이 터져 나왔다. 참아낼 수 있는 눈물이 아니었다. 상담사는 눈물이 옷에 떨어질세라 책상 위에 있는 갑 티슈에서 휴지를 두어 장 뽑아서 건넸다. 책상 위에 늘 갑 티슈가 구비된 이유도 나처럼 눈물을 흘리는 내담자가 흔하기 때문이었겠지. 상담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줬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마지막으로 책상 위를 살펴본다. 그 위에는 쉽게 꺼내 쓸 수 있도록 여러 물건이 깔끔히 정리되어 있다. 나를 대하는 태도. 내 마음과 잘 대화하는 요령. 비난에 대처하는 방법.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법. 생각과 현실을 구별하는 기술. 마음을 이야기하는 방법들. 그리고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차차 준비해서 갖추게 될 것이다. “선생님. 이제 제 책상이 많이 정리된 것 같아요.” 괜히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았다.

“가 볼게요. 선생님.” 그리고 상담사는 유리문을 열어 주면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우리가 다시 만나지 않으면 부영 씨가 잘 지내고 있다는 뜻이겠죠. 그렇게 생각할게요.” 나는 상담사를 향해 고개를 숙여 가벼운 인사로 답했다. 그리고 상담센터를 나왔다.

그러니까 저는 이전과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에요. 이건 분명히 해 두고 싶어요. 치열한 전쟁터였던 마음이 어쩌다 시끄러워지는 정도로 싸움의 빈도가 줄었어요. (중략) 정말 이 정도면 됐지 싶어요. 양극성 장애라는 진단명이 저의 엄청난 결함처럼 느껴졌었는데 말이죠. 이제 제 입으로 말할 정도로 지난 일이 진짜 지나갔으니, 이 정도면 됐지 싶어요.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삶이 아니다. 생각 속에서는 꿈을 이룰 수도, 사랑을 나눌 수도, 진짜 실패를 경험할 수도 없으니 그럴싸한 허구의 세상쯤밖에 되지 않는다. 더는 실체 없는 두려움이 싫다. 나는 실패하더라도 현실 위에서 넘어지고 싶다. 물론 그것도 쉽지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