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 신호와 직면할 때마다 (예컨대 시계를 볼 때마다 시곗바늘이 꼭 누군가의 생일을 가리키고 있다거나, 앞차의 번호판이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떠오르게 한다거나, 나눠 먹은 통조림의 유통기한이 누군가의 생일을 가리키고 있다거나 하는.) 나는 그런 걸 간절히 믿고 싶어진다. 세상엔 운명 같은 만남도 있는 거라고, 이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거라고, 너를 사랑하는 것은 필연적인 거라고. 운명 앞에 서면, 나는 가끔 누군가에게 무한히 다정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 「운명론적인」 중에서
다행히 나는 감정의 기복이 아주 큰 사람이다. 오르내릴 때마다 지금 상태에 맞는 것들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할 수 있었다. 감정의 기복이 큰만큼 그 폭 안에 더 많은 것들을 얼마든지 안을 수 있는 거다.
--- 「사랑하는 것을 많이 만들기」 중에서
다정함. 뜻과 소리가 따듯한 느낌을 가졌다. 좋아하는 단어들이 많은데 요즘 가장 날 평화롭게 만드는 명제는 단연코 다정함이다. 다정하게 구는 것들을 보면 잘 대해주고 싶다. 비슷한 온도의 마음으로 내게 쏟은 애정을 되갚아주고 싶어진다. 내가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뉜다. 부서지지 않게 조심스레 만지는 태도와 부서뜨릴 만큼 꽉 끌어안는 거. 어떤 날엔 한 발짝 떨어져서 조심스레 관찰한다. 그러다 보면 그동안은 모르고 지내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된다.
--- 「어떤 다정함은 존중에서 시작된다」 중에서
봄이 있음을 알게 되어야 비로소 겨울이란 단어가 생기고, 밤이 있음을 알아야 비로소 낮이란 단어가 생기는 것처럼 다정하지 않은 상태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비로소 다정함이란 단어가 성립할 수 있다. 우린 쓸쓸함을 배제하고는 결코 진정한 다정함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다. 쓸쓸해 본 사람만이 다정할 수도 있는 거다.
--- 「슬픔을 배제하고는 다정함을 말할 수 없다」 중에서
내게 할당된 다정함의 총량은 그리 많질 않아서, 누군가에게 따듯하기 위해선 꼭 그만큼의 따듯함을 빌려 와야 합니다. 때론 사물로부터, 때론 현상으로부터, 단어로부터, 타인으로부터 빌려온 따듯함은 내 몸을 그대로 통과해 누군가에게 쏟아집니다. 그럼 나도 잠시간 다정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 「다정함의 총량」 중에서
일단 연애를 시작하면, 일정한 만큼의 자아를 덜어내야 한다. 덜어낸 자아는 곱게 접어 볕이 들지 않는 곳에 켜켜이 보관한다. 신경 써서 고른 신발을 신고, 용납할 수 있을 만큼의 자아만 챙겨서 집을 나선다. 연애를 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나를 덜어내야 하는지 가끔 생각한다.
--- 「내가 너무 나라서」 중에서
한겨울, 침대에 앉아 스탠드 조명 아래에서 따듯한 양말을 신고 책을 읽는 걸 좋아합니다. 그 보들보들한 감촉. 당신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 「양말- 그 보들보들한 감촉」 중에서